정읍 영원면은 지붕없는 박물관
영원면의 오늘은 어제를 품고 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시간을 초월한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 방문 한 영원면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묻어놓은 보물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후에 이곳에 머물 사람들을 위한 그돌의 보물을 숨겨둔다. 어제에서 오늘을 거쳐 내일로 이어지는 이들의 보물찾기 놀이는 과거로부터 미래 를 향해 골없이 늘어진 시간을 압축해 한 평면에 겹쳐놓는다.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아서 영원은 고대의 문화유산이 풍부한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은 과거 백제의 오방 중 중방 에 해당하는 곳으로, 백제가 남긴 문화유산들이 눈여겨 볼만하다. 향토산업마을로 지정된 은선리 탑립마을에는 영원을 대표하는 명물이 있다. 바로 은선 리 삼층석탑이다.보물 제167호에 지정된 이 탑은 도로 옆 터에 혼자만 우뚝 솟아 뜬금 없으면서도 자꾸 눈이 가게 하는 게 있다. 이 석탑은 독특한 건축 양식 또한 눈에 띄는 데, 2층과 3층의 것과 어울리지 않게 길고 좁은 기형적인 1층 몸돌이 그것이다. 2층에 남방으로 설치된 문 두 짝도 특이한 것이, 보통의 경우에는 문을 만들기보다 벽에 새기 기만 한다고 한다. 은선리에서 보고 가야 할 것은 삼층석탑만이 아니다. 이 마을에는 또한 큰 규모의 고분 군이 있다. 이곳의 고분들은 천태산과 두승산에 걸쳐 270여개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산이 침식되면서 점차 그 모습이 드러났다. 때문에 이후 침식이 더 진행되면 더 많은 무덤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 산에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묻혀 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
영원에 묻힌 보물들
천태산 등산로의 초입에도 현대의 기술로 복원해놓은 고분이 있지만, 산을 좀 올라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의 고분들은 백제계 굴식돌방무덤으로 여러 개의 판석들을 다듬어 끼워 맞춰 만들어졌다. 놀라운 것은 그 정교한 짜임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석재가 틀이 꼭 맞게 짜여있었다. 가장 위에 있던 것은 복원을 거치지 않고도 거의 완전한 모습이는데, 현대에 와서 복원한 무덤도 그토록 견고하지는 않다고 하니, 당대의 기술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57호에 지정되어 있는 은선리 고분군이지만, 한때는 속상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바로 고려장터라는 오명이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곳에 묻힌 사람은 가난한 집의 늙은 부모라기보다는, 백제시대에 그 지역의 우두머리나 실력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돌방무덤이 이러한 오명을 입게 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역사조사를 할 당시로 거슬러간다.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효를 강조하는 우리의 정서에 반하는 행동이었기에, 그들은 도굴을 위한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고분군에 고려장터라는 혐오감의 이미지를 심어 도굴을 합리화하고 유물을 수습해갔다는 것이다. 슬픈 역사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슬픈 까닭은 그 이름이 부당함을 의심해보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무지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멈출 수는 없지만, 그것을 대면하는 우리의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배우고,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진다. 영원에 묻힌 보물들이 주는 보물 같은 가르침이다. |
흘러간 옛추억이 되살아나는 방앗간
오전 내내 문화재를 구경하고 나서 향한 곳은 이곳에서 5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 온 방앗간이다. 노교 방앗간 주인(우근식)은 32년 전부터 이곳을 운영하시다 폐업 하신지는 10년 쯤 되셨다고 한다. 이 지역에 있던 7개의 정미소들 중 남아 있는 것은 이곳뿐. 처음에 원동기를 쓰던 것을 버스 엔진으로 바꾸며 정미소도 진화 했지만, 이제는 도정작업이 공장화되어 옛날 방앗간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7,80년대 호황기에는 하루에 240가마의 곡식을 돌리기도 했다는데. 그 시절 방 앗간은 마을의 메카였다. 방앗간 주변에는 온갖 것들이 모여 거리가 활성화됐다. 당시의 방앗간은 은행 역할도 톡톡히 했다. 손님이 일정금액을 내고 보관증을 받으면,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 맡긴 금액과 그 이자만큼의 쌀을 주는 방식이었다. 50여 년간 마을의 번화가에 서있던 방앗간은 무엇을 보았을까? 쏟아지는 쌀을 담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쁜 손길, 깨끗해진 곡식을 보고 배부른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향하는 사람, 쌀이 나오길 기다리며 근처 주막에서 막걸리를 한잔 걸치는 사람. 시간이 흘러 원동기가 움직임을 멈췄듯, 시간이 흐르면서 그 풍경도 점차 변해왔을 것이다. 지평선과 만나는 생명의 기원 가장 마지막으로 정읍의 단풍미인 쌀이 생산되는 농지에 갔다. 넓은 평야지대 를 동진강 도수로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동진강도수로는 70년대 초 옥정호의 물을 계화도간척지구까지 물을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67km의 길이를 사람들의 지게와 아낙네들의 머리로 흙을 이어다가 도수로를 만들었다. 지대가 넓은 만큼 물길도 끝이 없었다. 옥정호의 물은 40여 년째 이 도수로를 타고 와 이곳을 촉촉하게 키워내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서 살아온 탓에 탁 트인 평야를 보니 눈이 시원해졌다. 넓게 펼쳐진 땅이 온통 노란빛이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햇볕은 따사로웠고, 도수로의 긴 물은 하늘과 구름을 담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평야인 까닭에 고개만 돌리면 모든 산을 볼 수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야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때론 낮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평야지대의 장점은 단지 보기 좋은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넓은 농지에 대체 어떻게 물을 대나 했더니, 평지이기 때문에 도수로의 물꼬만 트면 전체 농지에 배수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의 땅은 낮아지는 것 뿐 아니라, 가진 것을 공평히 나누는 것도 안다. 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느낀 여유는 넓은 면을 가득 채운 황금색의 벼이삭보다도 어쩌면 그 벼를 키워낸 땅의 너그러움 에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